12월의 나목(裸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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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나목(裸木)
  • 유성원 목사
  • 승인 2009.12.2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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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나목(裸木). 글잣말 따라 헐벗은 나무입니다. 겨울철이면 힘듭니다. 춥습니다. 보릿고개 시절에는 더욱 괴로웠습니다. 연약한 살결, 뽑아낸 진액을 다 긁어 들이는 이들 탓입니다.

나목은 서글픈 겨울을 지나는 나그네들의 가슴 저미는 자화상입니다. 타버릴 장작더미면 그나마 포기라도 하겠습니다. 그놈의 생명 탓에. 살아 있음 때문에. 내려놓질 못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살아 있음의 증거인 아픔은 고통의 또다른 얼굴일 따름입니다. 나목에겐 시리고 진저리나는 증거가 겨울나그네들의 얼굴에 서려있습니다.

나목의 아픈 증거를 더듬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수목(樹木)을 즐겨볼 요량(療養)이었습니다.

광릉수목원을 찾았습니다. 왕릉 터. 왕의 주검이 스친 자리에는 나목이 스스로를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흐렸던 이유에선가요. 그들이 아프게만 보였습니다. 물을 빨아올리는 나무.

어느 새 물이 되어버리는 나무. 나를 되비치는 나무그늘. 나무가 내 모습으로 환치(換置)된 것은 지난 시간 무던히도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던 이유에서지요. 그간 내가 아팠다는 사실을 나목이 상기시켜 줬습니다.

그게 맞습니다. 아픈 것은 나목이 아니라 겨울나그네 중 한 사람인 저였지요.

성탄의 찬란한 장식에서는 볼 수가 없는 나목. 화려한 형광빛 도시그늘을 헤치고 나오면 보이는 나목. 헐벗을 대로 헐벗어 버린 나를 보게 하는 나목.

식목일에는 묘목을 들고 도시그늘에서 벗어납니다. 소망 한 그루를 심습니다. 과연 그랬다면, 이 겨울에는 소망의 터전에 가 볼 일입니다. 분명코 거기에는 헐벗은 내가 서 있을 것입니다.

나목의 숲을 끌어안고서 돌아나오는 길입니다. 스산하던 마음이 따사로워집니다.

때 아닌 겨울비가 대지를 적십니다. 마음도 촉촉하게 젖어듭니다. 바깥은 아직 춥습니다만 안으로 영혼의 군불이 지펴진 듯합니다. 다만 겨울상념(想念)이고 동지애상(冬至哀想)일까요?

나목(裸木). 글잣말 따라 헐벗은 나무입니다. 겨울철이면 힘듭니다. 춥습니다. 그 추위, 그 고통을 뚫고 나오면 이윽고 봄이고 비로소 새싹입니다.

아직 겨울. 그러나 내일은 꽃봉오리마다 씨봄을 담은 눈이 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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