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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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주름
  • 유성원 전도사(정읍 / 중광교회)
  • 승인 2007.11.1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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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농로를 거닐다가 자전거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아니 정확히는, 스쳐 지났다. 소나기 무척 쏟아지는 날에 우비도 입지 않으시고 어디를 가시는 걸까 생각이 미치기 전에 지칠 대로 지치고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눈빛과 무너진 어깨뼈 그리고 바큇살에 얹힌 가벼운 발놀림이 먼저 들어왔다. 두 번째로 본 것은 뒷자리에 놓인 삽 한 자루. 그랬다. 논이 행여 다치지는 않을까 염려한 움직임이었다. 그건, 자연을 보살핌과 자연인 자신과 자손을 보살피는 행위였다. 초상을 곧 치를 것만 같아 보이는 노인이 그렇게 삶의 최전선에 다가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일까 아니면 할아버지와 손자였을까. 환자라며 따돌림 받기 십상인 외모의 그는 다운증후군이었다. 부어오른 얼굴 모양새만으로는 쉽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그의 어깨를 할아버지 (아버지)의 팔뚝이 따스하게 가로질러 감싸고 있었고 그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은 어느새 입가와 손등을 타고 하얀색 함박웃음으로 녹아내렸다. 탈곡기 털털거리며 쌀겨 날리는 농로에 선 두 사람의 발걸음은 그의 할머니(어머니)인 듯 한 이의 손길에 이끌려 집으로 향했고 들녘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비친 것처럼 내 눈에도 노을빛이 쏟아졌다.

모녀로 보였다. 무슨 사연의 골이 깊은 건지 두 사람은 언덕에 봉긋이 솟아 올린 무덤가에 앉아 소줏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그런 것을 마시니 응당 나이주름 패인 이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먼 곳에서 바라본 탓인지는 몰라도 얼마간은 그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하고 상기된 얼굴은 대개 세월을 삭히고 또 삭혀낸 결과로 얻어지는 법. 두 사람 또한 예외는 아니었을까. 표정에는 솟아 올릴 희망도 삭혀버릴 회한도 그 어떤 것도 없어보였다. 그저 그렇게 앉아 이미 간 사람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숙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Angels of ordinary times(Angelic Breeze.매일유업 cf 삽입곡)라는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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