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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성원 목사
  • 승인 2008.06.2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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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 달 샘

 

지긋하고 느긋한 오후를 보내고 있어. 큰 포부와 선명한 이상이 바로 이 한줌의 시간을 통하여 있겠지. 오랜만에 bach(1685-1750)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BWV 1043 2nd mov)을 듣고 있어. 이 곡을 들으면 `작은 신의 아이들'(children of a lesser God, 1986)이란 영화를 떠올리게 돼.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여자 주인공과 장애인학교에 새로 부임한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빚어낸 영화였지. 영화의 골자를 `상위의 언어:침묵에서 공명하는 영혼의 교감' 정도로 새겨볼 수 있을까? 수영장 물속에서의 키스. 턴테이블 앞에 선 남자에게 지금 듣는 음악을 알려달라던 주인공과, 눈짓과 몸짓이나 그 무엇으로도 음악이 전달되지 않아 흐느껴 울던 남자주인공의 모습. 파티에서, 그 사람이 많은 댄스홀 안에서 홀로 음의 세계에 율동하던 여자주인공.

사람은 누구나 그와 같다는 생각이야. 자기 세계가 있고, 세계와 세계의 만남은 애틋한 사랑으로 풍요롭다고 여기지만 실상을 보게 되면 그처럼 삭막할 수가 없거든. 애틋이 애태우다 다 태워지고 삭막해지다가 무미건조마저 지나온 애처로움으로 바뀔 즈음 우리는 알게 되지. 하나의 세계, 소행성 B-612에서 장미를 가꾸던 어린 왕자(Antoine-Marie-Roger de Saint-Exupery, 1900-1944)의 마음에 왜 우리가 그토록 공감했었는지를.

만남과 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리니 우리나라 시인들 모두가 최고의 시로 꼽았다는 `꽃'과 김춘수 시인(1922-2004)이 떠오르네. 그의 말년이 쓸쓸했던 것은 건조한 사랑에 대한 상념이 현실로 나타나기 때문이겠지. 애써 하나이 된 세계를 상실하고서 읊조린 시! 시인이 쓰러지기 전에 아내를 위해 지었다는 `S를 위하여' 부분이야:󰡒너는 죽지 않는다./너는 살아 있다./죽어서도 너는/시인의 아내,/너는 죽지 않는다./언제까지나 너는/그의 시 속에 있다./너의 죽음에 얹혀서/그도 죽지 않는다…

 

쓸쓸하다는 말에 이중섭 화가(1910-1956)의 삶이 겹치는 이유가 뭘까? 며칠 전 신문을 보니 구상 시인(1919-2004)에게 이중섭이 죽기 꼭 1년 전인 1955년에 건넨 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하더군. 이런 내용이야:󰡒구상 형. (…)제(第)는 여러분의 두터운 사랑에 싸여 정성껏 맑게 바로 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는 하느님을 믿으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구형의 지도를 구(求)해 가톨릭교회에 나가 저의 모든 잘못을 씻고 예수 그리스도님의 성경을 배워 깨끗한 새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성경을 구해 매일 읽고 싶습니다… 내일 15일 오후 4시경에 신문사(대구 영남일보)로 찾아뵙겠으니 지도하여 주십시오󰡓(구상 시인의 스승 공초 오상순도 떠올려지네.)

 

홀로 걷는 상념의 길이 이러하네. 다시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땅거죽 울릴 만큼 켜놓고 차 한 잔 들고 있네. 오늘 저녁엔 성경을 펴는 마음이 조금은 다를 것 같아. 한 대의 바이올린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을 곡.

우리 인생이 연주할 곡에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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