誠於中, 形於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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誠於中, 形於外
  • 유성원 목사
  • 승인 2008.08.1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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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시골에서 서울로 온지 5개월 쯤 됩니다. 여유로운 시간이 줄었고, 사람과 부딪힐 일이 많습니다. 말이 침묵을 접수하고, 행위가 생각을 먹기도 합니다. 아주 가끔씩 이러다 내 자신을 읽기보단 스스로를 잃어버리기 십상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닌 게 아니라 건강을 염려하게도 됩니다. 마음은 철부지 어릴 적으로 향했는데, 몸은 탁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살겠다고 숨 쉽니다. 그러고선 깨칩니다. 아직도 초연함에서 멀구나.

성어중(誠於中). 목사 안수를 받던 날 제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께서 자그만 쪽지에 써서 건네신 말입니다. 안으로 성실을 갖추라, 흔들림 없는 가운데 거하며 성을 이루라, 는 말로 새겼습니다.

그리고선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를 살필 겨를 없이 한 해가 흘러 여름에 접어들었습니다. 요 며칠 전에 그 말이 〈대학(大學)〉의 성의(誠意)편에 연유했음을 알게 됐습니다. 성어중(誠於中)이면 형어외(形於外)라, 마음 가운데 성이 있으면, 반드시 거죽으로 드러나게 마련인 법이라는 뜻이겠습니다. 표현은 정신생활의 발현이라던 최순우(미술사학자, 1916-1984)의 글도 여기에 기댄 말일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치로 헤아리자니 제 몸의 곤핍은 제 정신과 영혼의 곤고함을 반영한 것이어서 퍽이나 부끄러웠습니다.

성의(誠意)편 마지막 부분에는 부윤옥(富潤屋)이나 덕윤신(德潤身)하여 심광체반(心廣體쮐)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유함은 집을 윤택하게 하지만,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하여 마음이 여유롭고 몸이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성경에도 영혼의 강조와 더불어 몸에 대한 찬탄이 적잖습니다. 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졌다는 대목과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또, 모든 것이 허락되었지만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는 잠언도 있습니다.

분명 초연의 자리는 외따로 있지 않고 우리가 서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 놓였을 것입니다.

그 곳이 덕을 세우는 터전이고 또 몸을 윤택하게 하는 훈련의 공간임에 분명합니다. 그러한 덕과 사랑을 대신하여 제 안에 있는 것은 부덕이고 미움이었으니 부끄러움이야 자연스런 결과였겠지요.

모교 감리교신학대학교 앞길의 육교를 건너면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구두를 수선하고 판매하는 연로한 분이 계십니다. 수선 외의 시간은 대개 성경을 읽는 데 보내시는 듯한데, 두께 10cm가량의 성경을 어찌나 읽으셨는지 얼핏 보기에도 세 배는 부풀어 오른 듯합니다.

오랜만에 모교를 찾은 날, 눈물 고인 시선을 하늘로 올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거기서 성어중 형어외의 본체를 발견했습니다. 제 거짓기도가 탄로 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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