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2차 피해 심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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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2차 피해 심각 하다'
  •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 승인 2004.12.22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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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경남 밀양의 집단성폭력 사건은 그 피해자와 피의자가 청소년들이고, 피해가 1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다. 더욱이 이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경찰과 일부 언론이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한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다.

당초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은 여자경찰이 조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피해자의 신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언론에 유출됐으며, 아무런 피해자 보호조치 없이 대질조사가 이뤄졌던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 보호의 기본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피해자들이 피의자 가족들로부터 "신고해놓고 잘 사나 보자. 몸조심하라"는 협박을 받았는가 하면, 담당 경찰로부터는 "밀양 물을 흐려놓았다"는 폭언을 들었다는 사실에 이르면 공분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적 보호장치 있으나마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번 피해자 인권침해 사례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 상담현장에서 보면 이와 비슷한 경우가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성폭력사건의 신고율은 10% 미만이라고 한다. 성폭력은 살인, 강도, 방화와 함께 4대 강력범죄로 꼽힘에도 불구하고, 유독 성폭력 피해자들은 아직 대부분이 숨은 피해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사회 통념으로 인해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분위기가 존재하는 데다 그동안 피해자 권리를 보장하는 법과 제도가 미흡했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 고소를 결심한 많은 피해자들이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관계자들로부터 "당신이 성폭력을 유발하지 않았느냐"는 말을 듣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 "함께 즐겼지 않았느

냐"는 식의 비난 등 '2차 피해'로 인해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건 이후 사법기관, 언론, 주변인 등에서 피해자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이 나는 바람에 피해자가 다시 한번 정신적 사회적 피해를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또한 피해자가 형사사법절차상 갖는 권리가 제대로 고지되지 않아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자신이 어떤 권리를 갖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다.

예를 들어 여러 번의 반복 진술을 피하기 위해 수사과정에서 판사의 입회 하에 진술하는 증거보전제도나, 신뢰관계에 있는 자의 동석제도, 비공개 재판 청구권 등의 피해자 권리들이 이미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음에도 실제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또 피해자들은 자신의 사건에 대한 사법처리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현재의 진행 정도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런 반면에 피의자들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으며 수사와 재판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최근 법무부는 피해자보호법안을 마련하는 등 그동안 피의자의 인권보호에 초점을 맞췄던 관행에서 벗어나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경찰청이나 대검찰청, 법원도 성폭력 전담반을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밀양 집단성폭력사건의 수사과정에서 보듯 일선 수사기관에서는 피해자 보호를 위한 기본적인 조치조차 지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어떻게 '당할 만했다'는 말을…

지금도 사회 일각에서는 성폭력을 당한 여성을 두고 '당할 만했다'고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성폭력을 '당할 만한'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가 수사와 재판, 진료과정,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존중받아야 하고, 이들이 치유를 향한 강한 힘과 용기로 건강한 삶을 되찾아 가는 데에 사회적으로 따뜻한 배려가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200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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