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교수의 노동법 이야기] 5월 1일, 노동절의 유래

2023-04-24     하종강 교수(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하종강
‘노동절’과 ‘근로자의 날’
5월 1일은 전 세계 노동자들이 기념일로 지키는 ‘노동절(May Day)’이다. 모든 한자 사용권 나라들이 달력에 5월 1일을 ‘노동절’로 표기하는데 우리나라만 ‘근로자의 날’이라고 표기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승만 정부 시절에도 그 명칭은 ‘노동절’이었다가 1963년 군사정부 시절에 바뀐 이 명칭을 그 뒤 어떤 정부에서도 다시 바꾸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대 국회에 우리나라 모든 법률의 ‘근로’라는 단어를 ‘노동’으로 바꾸는 법안이 발의된 적도 있고, 2021년에는 이낙연 전 총리까지 나서서 “5월 1일은 노동절이 맞습니다. 법을 개정하겠습니다!”라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지만, 국회상임위 문턱을 통과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서울시·경기도·인천시·창원시·부산시 의회에서는 모든 조례의 ‘근로’라는 단어를 ‘노동’으로 바꾸는 조례안을 통과시켜 시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가 비로소 ‘노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과도한 혐오감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정상화되는 과정이지 결코 ‘불순한 변화’로 볼 일은 아니다. 정부도 ‘고용노동부’를 비롯해 ‘중앙노동위원회’, ‘한국노동연구원’ 등 정부 산하기관의 정식 명칭에는 대부분 ‘근로’가 아니라 ‘노동’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TV 방송에서 아나운서나 기자들도 ‘노동절’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남북전쟁 뒤 미국의 경제 상황
남북전쟁이 끝난 18세기 후반의 미국은 이민 노동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어 독점 자본가가 탄생하는 등 흔히 표현하듯 ‘부자들의 천국’이었다. 후일 ‘도적 귀족(Robber Baron) 자본주의’라고까지 불리게 된 이 시대의 부자들은 강아지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어 주거나,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우는 유행을 즐겼고, 이빨에 다이아몬드 장식을 박는가 하면, 애완용 원숭이의 시중을 하인들이 들도록 했다.
 
반면, 노동자들은 하루에 14~18시간씩 일하면서도 저임금에 시달렸다. 그들은 동물우리와 같은 판잣집에 모여 살았다. 당시의 신문 ‘포스테리아 델레스’에 실린 노동자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매우 비좁은 빈민가에서 비참한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노동자의 가족들은 동물적인 굶주림과 헐벗음의 수렁에서 간신히 생명만 이어갈 뿐이다. 그토록 작은 보수를 받기 위해서 그토록 오랜 시간 노동하는 수많은 대중, 그들의 모습은 자본가들이 누리는 번영에 비추어 비극적인 이변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 노동운동가의 동생은 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기도 했다.
      
“형님은 옷이 낡아 헤져 입을 수 없을 때까지 입었다. 죽는 날까지 걸치고 있었던 그의 외투는 노동조합 조직을 권유하러 방문했던 주물공장에서 튄 쇠똥 때문에 뚫린 구멍투성이였다.”
 
본래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란 자영농(Yeoman)의 자족적인 삶이었다. 하지만 ‘도적 귀족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자영농의 자유로운 삶은 한낱 꿈으로 전락했고, 대다수의 자영농은 공장의 일개 부품과 같은 존재인 노동자로 전락하고 만다.
 
8시간 노동 요구의 확산
이러한 상황에서 1880년 초부터 8시간 노동 요구가 확산되었다. 2만 8천 명의 ‘노동자 기사단’이 조직되었고, 1886년에는 그 숫자가 70만 명으로 불어났다. 불경기로 실업자가 많아지고, 빈곤은 심화되고, 임금은 오히려 삭감되었다.
   
1883년 ‘국제노동자협회’가 조직되었고 ‘8시간 노동제’를 중점 사업으로 선정했다. 이후 8시간 노동제 운동은 세계 각국으로 번졌고, ‘미국-캐나다노동총동맹’ 연차 총회에서는 1886년 5월 1일을 기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전개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1885년에 철도와 광산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급속히 확산되자 자본가들은 파업을 봉쇄하기 위해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무장을 시키고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그 당시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했던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을 썼다.
      
“이 야만적인 종자들은 몽둥이의 힘 밖에는 무서운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이것만 두고두고 기억나게 해주면 된다.”(뉴욕 트리뷴)
      
“노동조합원들에게는 수류탄을 던져 혼구멍을 내주어야 한다. 그러면 다른 파업 참가자들도 겁을 먹고 잠잠해질 것이다.”(시카고 타임즈)

      
1886년에 ‘미국노동총연맹’이 결성되었고 이 연맹은 설립규약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하나의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 투쟁은 압제자에 대한 피압박자의 투쟁이며 자본가와 노동자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또한 필연적으로 해가 거듭할수록 격렬해질 것이다. 이러한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사회 이익의 증진과 보호를 위해 굳게  단결하지 않는다면 수백만의 노동자들은 결국 엄청난 재앙에 부딪칠 것이다.”
      
운명의 5월 1일이 다가오자, 자본가들은 8시간 노동제 추진 운동을 ‘비미국적’이라고 단언하고 “노동자들의 소란은 외국 공산주의자들의 선동 때문이다. 5월 1일이 되면 노동자들의 폭동 때문에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시카고 신문에서는 “이 공산주의 놈들을 가로등마다 매달아 죽여야 한다”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8시간 노동제 요구가 급속히 확산됐고 언론은 이러한 상황을 “노동자들이 ‘8시간 미치광이’가 됐다”고까지 표현했다. 5월 1일이 다가오자, 결의문 발표 및 시가행진이 잇달아 일어나고 횃불 행진을 하기도 하는 등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드디어 5월 1일,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 구두(이미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는 공장에서 만든 제품)’를 신고 ‘8시간 담배’를 피우며 깨끗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온 가족이 거리에 나와 마치 축제처럼 노래를 부르면서 평화 행진을 벌였다.
      
          <노래>
          우리도 햇볕을 보고 싶다네
          꽃냄새도 맡아보고 싶다네
          하나님이 내려 주신 축복인데 우린들 아니 볼 수 없다네
          우리는 여덟 시간만 일하려네
          조선소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점포에서
          우리는 힘을 길러왔다네
          이제 우리 여덟 시간만 일하세
          여덟 시간은 휴식하고
          남은 여덟 시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세

      
이 운동을 통해 대략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기도 하였으나, 5월 3일, 자본가들의 사주를 받은 경찰과 군대가 노동자들을 향해 발포했다.
 
5월 4일, 그 전날의 발포에 항의하는 시위대 30만 명이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하던 중 폭탄이 터져 200여 명의 노동자가 부상당하거나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8시간 노동제’는 헌신짝처럼 버려졌고, 수백 명의 노동자가 체포당하거나 처형당했다.
 
파업 지도자 7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중의 한 명인 스파이즈는 최후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 이 최후진술은 이후 전 세계 수많은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되었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숨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그러면서도 해방되기를 애타게 원하고 있는 수천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다면 말이다!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노동운동의 불꽃은 끊임없이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절 제정
1889년 7월, 세계 20여 개 나라의 노동운동 지도자 400여 명이 참가한 ‘국제노동자대회(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인 ‘파리 총회’에서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고취하기 위해, 매년 5월 1일을 국제적인 노동자의 명절로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23년부터 세계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절 행사를 열어왔으나 이승만 정부는 “잔인무도한 공산도당과 같은 날에 기념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날짜를 3월 10일(대한노총 설립일)로 바꾸었고 박정희 군사정부는 그 명칭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꾸었다. 정부가 그 날짜를 다시 5월 1일로 되돌린 것은 1994년이었으니,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전 세계의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절을 지키게 되기까지 1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