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할머니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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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할머니에게서
  • 유성원 전도사(정읍 / 중광교회)
  • 승인 2007.03.2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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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목회 나와서 겪은 종교 예식은 장례예배였습니다. 예식이나 행사는 흔히 `치러지는 일'로 여겨지나 제게 장례예배는 일종의 종교 경험으로 `겪어진 일'이었지요. 아흔 세월을 넘기고서 한 주간 곡기를 끊었던 이안순 집사님은 저를 `조카'라 부른 며칠 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처음 만남이 곧장 마지막 만남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 해가 흘렀지요. 아직도 이안순 집사님이 거처하던 집은 쓸쓸히 시골의 정경을 품고 있고, 우물 곳곳에 패인 이끼의 흔적엔 시간의 풍상만 가득합니다.

이듬해엔 나삼순 집사님이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팔순을 넘기고 구부정한 허리에 무척 불편한 거동이었지만 그나마 명료한 정신은 유지하고 계셨는데 그만 폭설 한복판 눈길에 낙상하신 겁니다. 그 해 여름 나삼순 집사님은 불편한 몸으로 저를 데리고 정읍 재래시장을 찾았습니다. 팥죽 한 그릇 나누고서 양은냄비 한 개와 자반고등어 한 손, 새우젓 삼천 원 어치를 제 손에 들려주었지요. 8년 만에 찾은 시장이라고 했습니다. 그간 그리운 얼굴들이 있었던 모양인지 지난 시간 시장을 오고가며 사귄 이들을 휜 허리 들어 찾기에 바빴지요. 그러나 세월의 물결이 시장을 지나간 후였습니다. 지인들이 고인으로 바뀌었지요.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뀔 때면 나이 드신 분들 부음을 자주 접합니다. 그리곤 한없이 가벼운 인생의 무게를 느낍니다. 보편의 소식인 죽음과 개인에게 드리운 특별한 사연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은 거짓임에 분명합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노릇인 까닭이지요. 게다가 살면서도 인생은 빛이 어디서 오는지,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요. 그저 누리면서 살아갈 뿐인 인생에 아는 것이 있다면 결국은 죽는다는 사실이요 의지로 취한 선택 또한 죽음에 이르는 방정식으로 귀결하는 것 아닌지요.

그렇다고 허무에 휩싸였다거나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 덮인 말은 아닙니다. 첫 종교 예식으로 장례예배를 겪은 이유를 재삼 헤아렸을 때, 제게 주어지고 있는 하루하루들을 최후의 순간으로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확고히 하는 것 뿐 입니다. 아무리 욕심이 많고 그 욕심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발이 닿는 곳의 공간의 한계와, 어제 일을 돌이킬 수 없고 내일 일을 미리 취할 수 없는 시간의 한계. 백 통의 물이 있더라도 내겐 한 모금의 물로 충분하다는 사실의 새삼스런 인식입니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낼 수 없는 물을 거저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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