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덜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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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덜어내기
  • 유성원 전도사(정읍 / 중광교회)
  • 승인 2005.02.2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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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뉴스에서는 전북과 호남 지역에 내린 눈이 9년 만에 가장 큰 눈이라고 합니다. 대설주의보에서 대설경보로 상황이 바뀌자 더 많이 내리는 것 같습니다. 간간이 내리더니 어제 오늘은 그야말로 퍼부었다는 표현이 인색하지 않습니다.

문득 샘터라는 출판사에서 낸 책 가운데 금아 피천득과 우암 김재순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신앙에 관한 대화에서 우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깊이 있는 신앙생활은 못하고 있습니다만 그저 `신앙이란 홀로 있는 것', `신이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자득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기도는 소원이나 구원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아침부터 오후 내내 눈을 치며 보냈습니다. 시신경에 발효된 청회색의 풍광도 한껏 받아들이면서.

저녁이 가까울 무렵이면 보아주는 이도 없이 폼을 잡곤 하는데 오늘도 예외가 아닙니다. 음악을 틀어놓고 찻잔을 들고서 창밖을 응시합니다.

매일매일 시선에 걸리는 자연이 다종다양합니다. 한 켠에 놓아둔 볶은 콩을 집어먹는 까치가 정답습니다.

녀석은 껍질 속 알맹이를 어떻게 저리 잘도 골라먹는 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무엇보다 오늘은 가지런히 정돈된 눈길에 혼자 뿌듯해합니다. 눈길에 눈길을 주다보니 우암의 신앙세계가 그려지는 듯합니다.

며칠 전에는 우리 교회에 나오는 꼬맹이들 네 명이 졸업했습니다. 제 33회 소성중학교 졸업장 수여식과 제 81회 소성초등학교 졸업장 수여식. 종이 한 장에 담아낸 사연들과 더불어 더 성숙한 길로 나아갈 그들을 축하해주고 왔습니다. 전 과목 1등을 차지한 혜영이와 전북 지역에서 체육 부문에 탁월한 석현이가 자랑스러웠지요.

그러나 더 가슴 뻐근한 장면은 졸업식장에서였습니다. 소성중학교의 경우 졸업생 13명을 포함해 전교생이 40명 남짓합니다. 수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수고하시는 분들의 모습에서 교실 창으로 쏟아진 햇살이 살갑게 와 닿고 졸업식장이 엄숙한 이유를 발견했지요.

혜영이의 답사가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한 것은, 답사의 글처럼, 졸업은 떠남을 의미하고 시간은 우리를 한 곳에 잡아두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학교처럼. 설을 지낸 후면 그리스도교 교회력으로 사순절이라는 절기가 찾아옵니다. 예수의 고난을 우리도 따라 살아가자는 절기지요. 도가의 도덕경에서 학문이란 하루하루 쌓아하는 것이며 도란 하루하루 덜어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도리를 살아가자는 것이 사순절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는 서른세 살에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올해로 제가 서른셋입니다. 신앙과 졸업과 고난이라는 단어를 눈 위에 써봅니다. 하늘의 섭리를 헤아리고 땅의 도리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소성중학교 졸업식장 앞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투박한 액자에 걸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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