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이와 새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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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와 새싹
  • 유 성 원 목사
  • 승인 2011.04.2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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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 달 샘

사월입니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서로 간 제 힘 자랑하듯 밀고 당기는 틈새에 사월이 있습니다. 꼭 그 사이에서 봄꽃 피워 올리느라 고생하던 올 사월도 시간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겠지요. 사월은 계절의 냉기를 가져가는 시간의 선물입니다. 사는 곳도 사월이 겪듯 힘의 각축장입니다.

억지 힘 자랑과 까탈 섞인 다툼마저 밑거름으로 작용할 땀내음의 현장 말입니다. 이럭저럭 사는 일 겪고 나면 쉼이 찾아올 것입니다. 사월이 아프고 나면 이윽고 계절의 여왕 오월입니다.

제 사는 인근에는 〈오월〉이란 드립커피 전문 까페가 있습니다. 듬성듬성하던 까페들이 지금은 우후죽순이라서 동네 어귀의 〈오월〉 또한 별 도드라진 맛과 향기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주인양반은 좀 섭섭해 하실까요? 그러나 없음으로 하여 〈오월〉의 독특한 멋이 살아난다면 아쉬운대로 등 토닥이는 위로 정도는 될 듯합니다.

처음 커피를 마시던 날 저는 `없는 것'에도 주목할 수가 있구나, 놀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무엇 하나 `있는 것'을 찾지, `없는 것'에 주목하는 경우가 없는 법인데, 〈오월〉은 `있음'의 반대편에 더 귀중한 `없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뭔가 없어 보이는 것, 텅 비어있는 것, 헐렁거리는 것을 참지 못한 채 자로 잰 듯 반듯한 것이나 꽉 채워져 있는 것이나 산뜻하게 갖춰져 있는 것에 만족해하는 살림의 터전에서 `없음'을 보게 하고 감사하게 한 〈오월〉이 고맙기만 합니다.

처음 갔던 날 커피를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로스팅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곱게 가는 글라인더도 비어있었고, 물론 모든 잔들도 비어 있었습니다. 며칠 뒤. 빈 테이블과 빈 의자에 쌀 한 가마니 무게를 앉히고 나니 앉혀준 의자가 고맙고, 맛과 향을 담으려고 스스로를 깨끗하게 비워내는 잔들이 왜 그리 소중하게 느껴지는지요. 한 잔에 커피의 다양한 맛과 향의 스펙트럼을 담기 위해서 주인양반은 또한 드립머신을 정성 가득하게 `비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없어야만 있게 되는 이치를 깨닫는 시점이었습니다.

문득 창 밖을 보았습니다. 겨우내 시렸던 몸을 펴듯 나무들이 새순을 돋우기 위해 기지개 펴고 있었습니다. 봄이 도래하는 풍경 사이로 가지뿌리 잘린 옹이가 뭉툭한 몸뚱이를 내밉니다. 죽은 듯 고요했던 계절 동안 옹이는 한 생명가지의 끝을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바로 그 주검 같은 옹이를 뚫고서 새싹이 솟습니다. 없는 곳에 있게 되고, 죽은 것이 살게 되는 풍경. 오월에 앉아 사월이 주는 옹이와 새싹의 이치를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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