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팥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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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팥물
  • 유성원 목사
  • 승인 2010.08.2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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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도 추웠습니다. 옷깃 여미는 겨울 끝자락은 아직 풀리지 않은 한기(寒氣)로 도시 그늘 구석을 쟁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빌딩 숲을 돌아서니 좁은 비탈길. 채 녹지 않은 빙판길에 연탄재가 재 몫을 다합니다. 대심방(大尋訪) 길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그 성도님이 뿌린 게 분명했습니다. “아, 메가폴리스, 이 도시 한 쪽에 아직 70년대의 개발도시 풍경이 있다니...” 마음 구석의 냉기(冷氣)를 아릿하게 환기시키는 도시 그늘에서 저는 몇 달 뒤면 재개발로 사라지는, 시쳇말로 판자촌의 마지막 풍경을 걸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구비길 저 끝에서 해맑은 얼굴로 손 흔드는 성도님의 몸짓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한 키 아래의 문을 열고 허리 꺾어 안방에 들어갑니다. 허나 안 방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5평 남짓해 보이는 공간을 뚝 잘라 한 쪽이 시멘트 속살 빛 그대로인 주방이고 벽돌 몇 장 덧댄 계단 위가 안방입니다. 그곳이 모녀의 살림 공간 전부였습니다. 몇 번이고 누추한 곳에 왜 오셨냐고, 죄송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온전히 고개 숙여 심방 못해 온 저야말로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성도님 앞에 선 저는 하나님 앞에서 목 곧은 백성임에 분명했습니다.

 

 

 

 

생활 형편과 신앙의 현재를 두루 나눈 뒤, 기도했습니다. 너무도 척박한 살림에 가슴 아팠습니다. 먹먹한 현실을 내 현실로 품고 드리는 중보와 축복의 기도가 얼마나 빈약한 위로인지, 그것이 더 마음 아프게 했습니다. 겉으로는 축복의 기도요 속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억한 심정의 토로였습니다. 기도 후 성도님이 대심방을 감사하며 사랑으로 공궤하십니다. “목사님, 전도사님... 저는 드릴 것이 이게 전부네요... 아마 처음 드셔보는 걸 텐데...” 내신 것은 팥을 우려낸 팥물이었습니다. 그거 마시는 순간, 하나님께 대한 원망의 냉기(冷氣)에 가로막혀 영혼 구석 고였던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목젖 위로 넘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도님 인생의 사연이, 아픈 현실이 제 영혼에 생채기를 낸 듯 합니다. 이윽고 시돈 땅 사르밧의 여인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왕하 17:8-24). 통의 가루 한 웅큼, 병의 기름 몇 방울로 엘리야를 공궤했던 여인.

 

 

 

 

그리고 2년 여 흐르고 있습니다. 재개발의 현장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을 터에, 구비길과 살림 공간 곳곳 배였던 한기(寒氣)는 걷혔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성도님 가정의 한기(寒氣)도 전부 가셨는지, 제 영혼의 냉기(冷氣)도 그와 함께 없어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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