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 인생의 전환점 ‘치위생부사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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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내 인생의 전환점 ‘치위생부사관’의 길
  • 강주하 상사(육군 비호부대)
  • 승인 2024.11.0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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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육군 치위생부사관이다. 육군 부사관 학교에서 정복을 입고 어깨에 하사 계급장을 달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군 생활도 만으로 12년째다. 어쩌다 나는 군인들 사이에서도 생소한 치위생부사관의 길을 걷게 됐을까.
 
치위생과 1학년 재학생이던 나는 막연히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가족들도 모르게 마치 ‘비밀 작전’을 치르듯 혼자만의 꿈을 키워나갔다.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육군 ‘의무부사관’ 모집 공고를 통해 의무병과 안에 ‘치위생부사관’을 따로 선발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전공을 살리면서 동시에 군인이 될 좋은 기회라 생각했고, 반드시 군인이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졸업과 동시에 치과에서 일할 좋은 기회도 마다하고, 부모님의 반대도 물리치고 나는 군인이 됐다. 그만큼 절실한 꿈이었다.
 
▲파병 당시 현지 환자를 돌보고 있는 강주하 상사(우측)
▲파병 당시 현지 환자를 돌보고 있는 강주하 상사(우측)
임관까지의 길이 쉬운 길은 아니었다. 기초 군사훈련을 받는 동시에 군대라는 낯선 조직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고된 훈련과 낯선 상황에 포기를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정한 길이니, 힘들더라도 끝을 맺어라”라는 부모님의 한마디에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악으로 깡으로 버텨 육군 하사로 임관했고, 1사단으로 자대배치를 받아 치위생부사관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임관식의 벅찬 순간은 잠깐이었다. 또 다른 난관들을 직면했다. 의무병과에 치위생 분야가 있다고는 하지만, 늦은 도입으로 인해 체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체계를 보완하는 게 급선무였다.
 
초임 하사에겐 이 같은 문제들은 무겁게만 다가왔다. 그토록 원하던 군인이 됐지만, ‘어떤’ 군인이 될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라 판단했다. 군 치무분야의 전문성을 함양하기 위해 틈이 날 때마다 공부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치과대학병원을 비롯해 美 8군 치과중대에서 직무 향상 교육을 받았다. 또한 장병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면서 치위생부사관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격오지 특성상 치과 내원이 힘든 현실을 고려해 ‘찾아가는 치과순회진료’, ‘구강보건교육’ 등을 부대 안에 정착해 나갔다.
 
나의 군 복무는 선택하는 일이 아닌 개척을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선진화된 육군 치과를 만들기 위해선 새롭고 다양한 경험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2015년 경북 문경에서 열린 ‘세계군인 체육대회’에 파견돼 세게 각 군의 대표 선수들을 만나기도 하고, 타국의 치무 업무에 대해 파악하는 등 값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군생활에서 치위생부사관으로서의 지평을 넓히게 된 건 두 차례의 해외파병을 통해서다. 2016년 레바논에 주둔한 동명부대에 파병되어 장병을 비롯해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치과 진료를 진행했다. 동명부대는 최초로 치과 군의관과 치위생부사관이 함께 포함된 부대였다.
 
▲파병 당시 치과버스를 이용한 순회 진료 현장
열악한 진료 여건으로 치과 버스를 이용해 다섯 개의 마을을 순회하며 진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어떤 환자는 기구 없이 손으로 발치 할 수 있을 만큼 구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들에겐 예방적 치료보다도 통증 치료가 우선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진료 지원뿐만 아니라, 인근 학교에 방문해 감염·위생관리, 구강보건교육을 함께 지원해 나갔다. 어려움 속에서 배운 것들은 나와 환자 모두에게 더 뜻깊게 다가왔다. 레바논에서의 이런 다양한 활동은 UN 평화유지군으로서 한국군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유익한 경험이었다.
 
두 번째 파병국은 남수단이었다. 척박한 땅, 오랜 내전 끝에도 정치적인 갈등과 분쟁이 존재하는 곳, 언제든 다시 분쟁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이었다. 첫 파병 때와는 다르게 치과 업무에 국한하지 않고 부상자를 처치하는 교육도 해야 했다.
 
그곳에서의 상황도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역만리에서 장비가 말썽을 부리기라도 하면 한국에 있는 장비 업체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수리를 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경우에는 장비를 한국으로 보내야 했지만 모든 장비가 돌아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고, 길게는 4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레바논에서는 부족한 물자를 주변 지역에서 구할 수 있었지만, 남수단에서는 현지 조달조차 어려웠고 당연히 진료 지원에도 지장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파병 당시 현지 환자를 돌보고 있는 강주하 상사
두 차례의 파병 모두 수많은 난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열악한 조건 속에서 환자를 만나면서 군이 지향하는 목표에 도달해 가는 과정의 뿌듯함은 그 어떤 단어로도 담아낼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통해 내가 꿈꾸던 치과위생사 그리고 군인의 모습을 점차 완성해 갔다.
 
지금 돌아보면 치위생부사관으로서 항상 치과 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치과위생사이기 전에 의무부사관으로서 ‘대량전상자 처치반’ 훈련에 참여, 방독면·보호의를 착용하고 부상자를 중증도 분류하고 처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때로는 전투 부상자처치 교관으로서 부대 교관을 양성하고 군 장병을 교육하는 업무를 맡기도 했다.
 
지난 3월에 다녀온 한미 연합 치무전개 훈련에서는 전시에 필요한 치무 물자와 장비 전개, 이동 치무반 운용 등 각종 절차와 규칙을 숙달해야 했다. 치위생 업무뿐만 아니라 군인이기에 갖춰야 하는 전투력을 기르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치위생부사관이지만 단순히 진료에 국한되지 않고 꾸준히 저변을 확대해 가고 있다.
 
군진치과위생사의 체계를 잡고 입지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를 위해 나는 치위생부사관으로서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곳을 향해 계속해 나아갈 생각이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다. 군에서 일하고 있는 군진치과위생사 모두가 개개인의 역량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물론, 이를 위해 군과 대한치과위생사협회, 그리고 밖에서 군을 바라보는 많은 치과위생사 선생님들의 지원과 응원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디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든 군인으로서의 사명감과 군진치과위생사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군진치과위생사의 미래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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