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이 선거의 결과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 참모총장으로 전쟁을 지휘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당선으로 귀결됐다. 그러나, 세계사 측면에서 이 선거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 시작의 단초가 되었다.
당시 비제도권인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일명 나치당)의 대선 후보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36.8%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고, 이후 나치당이 원내 1당으로 올라서면서 당수였던 히틀러는 내각의 총리가 됐다. 그리고 힌덴부르크가 당선 2년 만에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히틀러는 대통령과 총리직을 합친 총통의 자리에 오른 뒤 우리가 익히 아는 나치 독일을 탄생시켰다. 이후의 역사는 모두가 알고 있는 유대인을 비롯한 세계 수난의 역사이자, 전무후무한 최악의 독재자이자 범죄자의 이야기이다.
단초가 된 1932년의 선거와 히틀러의 정권 장악은 “유대인이 독일 경제를 망쳤다. 경제 주권을 유대인에게서 빼앗아와야 한다”라는 극단적인 선동을 토대로 한 나치당에 빠져들었던 당시 독일 국민 스스로의 선택이기도 하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청년층은 나치당의 극단적인 주장에 열광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지지하는 장년층을 이른바 ‘꼰대’라며 비난했다. 그때는 그게 옳았을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히틀러라는 최악의 괴물을 탄생시켰고, 그에 동조하고 그를 위해 총을 들었던 독일 국민은 지금도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있다.
지금은 알 수 있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알 수 없었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으며 경험은 일천하니까.’ 그래서 정치에 올바르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서로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를 중재하고 51%가 49%를 받아들이고 함께 손잡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가 해야 하는 일이고 그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이고 의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51%의 함정이 있다. 그건 제한된 정보, 왜곡된 정보, 그리고 선동된 정보에서 오는 왜곡이다. 그 왜곡의 힘은 미래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는 위험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신념, 그리고 과반이라는 숫자적 우위에 의해서 왜곡을 ‘정의’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반을 결정하는 것이 단 1%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정치에서는 철저하게 방관자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실천자적 입장에서 행동해야 한다. 즉 유권자는 변덕스러워야 한다. 충성스러운 유권자는 독재자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정치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어야 하며 그 주도권을 쥐는 것은 충성스러운 유권자가 아니라 까다로운 유권자여야 한다. 우리의 직업에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하려면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까다로운 유권자가 되어야 한다. 대선과 총선 등 일련의 흐름 속에서 20~30대 여성들의 정치참여가 눈에 띈다. 옳지 않은 일에 나름의 ‘깨발랄한’ 방법으로 저항할 줄 아는 그야말로 ‘쿨내 나는 힙함’이다. 그러나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정치인에 대한 팬덤 문화이다. 정치인은 맹목적인 성격의 팬덤을 가지면 안된다. 지지하되 비판할 줄 아는 유권자를 가져야 한다. 그리해야 선거 후 그들이 어느 사이엔가 ‘을’에서 ‘갑’으로 바뀌는 것을 경계할 수 있다.
20~30대의 정치참여는 매우 유의미한 결과를 남긴다. 정치인들이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를 잠시 하고 지나갈 사람이 아니라면 평생 정치인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면 그들과 같이 늙어가야 할 것이며 그들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정치참여를 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정치인에 후원하고 정치인에 정책제안을 하고 옳지 않은 정책에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와 후세들을 위하는 의무라고 생각한다. 정치, 그건 바로 생활이라는 걸 우리는 요즘 모두 느끼고 있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정치, 그건 우리의 관심이 만들어낸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에 봉사하는 치과위생사이므로.
*이 글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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