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통제되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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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통제되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 김영경 교수(충청대학교 치위생과)
  • 승인 2026.06.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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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경 교수
김영경 교수
디스토피아 문학의 양대 산맥인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통제된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지만, 통제의 방식은 차이가 있다. ‘1984’은 폭력과 공포를 통해서, ‘멋진 신세계’는 쾌락과 약물 등을 통해서 통제를 한다.
 
‘멋진 신셰게’는 공장에서 철저하게 계급이 정해져 출생된다. 계급은 그에 맞는 지능지수 등을 인위적으로 조정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점을 가질 수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프로그램을 통해서 만들어진 어쩌면 ‘피와 땀’이 흐르는 로봇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우울을 느끼면 부작용 없는 약물을 통해 행복감을 느낀다.
 
여기까지만 보면 ‘디스토피아’가 아니고 ‘유토피아’다. 태어날 때부터 직업을 선택할 고민이 없고, 그 직업에 대한 거부감이나 괴로움도 없고 일로 인한 슬픔을 느끼면 약물을 섭취해 행복을 느끼면 그만이다. 여성은 출산할 필요가 없으니 출산의 고통을 느낄 수가 없다. 아니, 출산으로 인한 고통은 신세계에서는 죄악이다. ‘눈물’이 없는 고독을 느끼는 것이 죄악시 되는 그런 세계가 ‘멋진 신세계’이다.
 
물론 ‘멋진 신세계’의 담장 너머는 외로움, 수치심, 사랑, 공감, 출산의 고통을 느끼는 ‘야만인 보호구역’이 존재한다. ‘야만인 보호구역’이라고 이름 지어졌으나, 야만인(이름을 다시 붙인다면 인간 본연의 고결한 생명체)으로부터 본인들을 격리시키는 공간으로써 담장은 존재한다. 담장 안의 그녀가 담장 밖으로 떨어져 나와 출산의 고통으로 나은 아들은 담장 안으로 들어와 모든 감정이 통제되는 사회에서 구경거리로 전락하다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1984’는 거울(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것을 감시당하고, 이중사고를 세뇌당하면서 산다. 진실의 왜곡, 역사의 조작 등을 통해 비판적 사유는 없어지고 폭력과 공포로 통제된다. 역사의 조작, 진실의 날조 등을 비판하던 주인공은 자신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방법 앞에서 결국은 무너져버리고 만다.
 
2가지 소설 다 슬픈 결말이다. 2가지 소설 모두 인간이 인간을 통제하지만 ‘멋진 신세계’는 프로그래밍화 된 인간이 통제되는 사회이므로 감시도구(텔레스크린)을 통한 독재자의 통제인 ‘1984’와는 다르다. 모든 것이 통제되어 있는 가운데에서도 일률적인 왜곡과 조작의 통제에 반항하는 주인공(1984)과 인간 본연의 감정을 통제당하고 싶지 않은 주인공(멋진 신세계)의 기본적인 감정은 통제된 것에 대한 ‘분노’이다. 인간의 욕구 중 소속의 욕구를 이겨내고 한 단계 진보할 수 있는 것은 ‘옳지 않음’에 대한 분노이다. 분노는 ‘나의 의지’가 살아 있다는 기초 신호이며, 분노의 단계를 지나면 ‘옳은 것에 대한 행동’이라는 ‘용기’의 ‘이성’이 생겨난다.
 
지금 대한민국은 무언가 자신의 내면과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분노에 싸여 있다. 어떤 이들은 ‘공정’이란 가치의 훼손에 대한 분노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좌우 이념의 분리에 대한 분노라고 한다. 21세기 대한민국, 더 나아가 지구촌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어떠한 이념도 ‘인간의 욕망’ 앞에서는 그저 하나의 문장 구조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체제든 그 체제의 상부에 있는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의 가장 꼭대기는 ‘자아 실현’ 아니라 ‘통제의 욕구’ (존중의 욕구가 아닌)가 아닐까 싶다. 남을 통제하여 내 발아래 두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이기적인 유전자’의 발로가 아닐까? 그런데, 남이 아니라 나를 통제하는 것은 더 큰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결국은 ‘자아실현’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나를 통제하는 것은 단순히 기초적인 욕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대한 ‘관용’이 필요하다. 관용은 단순하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한발 물러서 나를 바라보고 온전히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남을 이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나의 마음속의 분노를 잠재우고 관용하는 일일 듯싶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 해서는 안 될 일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윤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공동의 선을 위하여 법을 만들어 지키도록 해왔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악법은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악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두가 한 번 한발 물러서서 생각 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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