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망중한(忙中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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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망중한(忙中閑)
  • 김흥세 기자
  • 승인 2026.07.3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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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경 교수
성미경 교수
지난 1학기는 많은 교육과 배움의 연속으로 바쁘고 빠듯한 일정이어서 ‘쉬어야 한다.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소리를 자주 듣고 나 또한 느끼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를 틈이, 나를 한번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출장 중 전북 원광대학교병원의 뒤뜰에서 잠시 망중한의 시간을 가졌다. 잠시 멈추고 가자던 지인의 안내로 얼떨결에 발을 들인 곳은 잘 가꾸어진 수목원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누군가의 손길이 오래도록 정성스레 다듬어온 흔적이 느껴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마치 아무도 손대지 않은 듯 자연 그대로의 숲길이 펼쳐진다. 사람의 정성과 자연의 방임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겹쳐져 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숲길을 들어서면 작은 연못에는 연꽃이 만개해 있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 그토록 맑고 정갈한 얼굴을 내미는 연꽃을 보고 있자니, 저마다의 자리에서 애써온 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잠시 뭉클해졌다. 그런데 그 고요한 풍경 사이로 별안간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황소개구리였다. 어찌나 그 소리가 크고 우렁찬지,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연꽃의 고운 자태와 황소개구리의 걸걸한 울음소리가 한자리에 있다는 것이 묘하게도 잘 어울려, 이 숲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해주었다.
 
연못을 돌아 나오는 길에는 무궁화가 색색이 피어 있었다. 멀리서 스쳐 지날 때는 그저 익숙한 꽃이려니 했는데,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그 자태가 참으로 단아하고 고왔다. 무궁화가 이렇게도 예쁜 꽃이었구나,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늘 곁에 있어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들이, 마음을 내어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배운다.
 
사실 무궁화를 마주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작은 의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크게 화려하지도 않고, 질 때는 꽃잎이 지저분하게 오그라들어 떨어지는 그 꽃이 어떻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화가 되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오늘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들여다본 무궁화는, 그 어떤 꽃보다 곱고 단아했다. 한 송이 한 송이의 결이 이렇게 섬세했던가 싶어 새삼 놀랐다.
 
그 여운이 남아 집에 돌아와서 무궁화의 내력을 찾아보니,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무궁화(無窮花)라는 이름 자체가 '다함이 없는 꽃'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실제로 여름부터 가을까지 백여 일에 걸쳐 매일 새로운 꽃이 피고 진다고 한다. 하루하루 저버리는 꽃송이가 아쉽다기보다, 그 자리를 다시 새 꽃이 채우며 이어가는 모습이야말로 '무궁'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끈질긴 생명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문헌에도 한반도를 무궁화가 많이 자라는 땅으로 기록해 놓았을 만큼, 이 꽃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땅과 함께해 온 존재였다. 개화기에 애국가 가사 속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에 담기면서 자연스레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돌아보면 무궁화가 국화로 여겨져 온 까닭은 화려한 겉모습 때문이 아니라,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피어나기를 거듭하는 그 은근하고 끈기 있는 생명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화려하진 않아도 곱고, 쉬이지는 듯해도 다시 피어나는 무궁화의 자태 속에서, 오늘 나는 비로소 이 꽃이 왜 우리 곁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몇 걸음 더 옮기니 이번엔 배롱나무와 수련이 그리고 이름 모를 많은 꽃들이 있었다. 숲과 어우러진 길 위로 바람이 스치고, 한여름 매미는 목이 다 쉬도록 울어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시끄럽다기보다는, 이 계절을 온 힘을 다해 살아내고 있는 어떤 생명의 진심처럼 들려왔다. 그렇게 천천히 모든 것을 잊고 숲이 주는 위로와 함께하는 친구, 너무나 좋아하는 우릴 보며 오길 잘했다는 지인의 미소는 잠시 멈춤이 주는 찐한 행복이었다. 
 
숲길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자리한 곳에서는, 오랜 역사를 지닌 쌍화차 한잔을 마주했다.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 넘기니, 몸 구석구석이 다독여지는 듯했다. 바쁜 일상에 지쳐 있던 몸과 마음이 그 한잔의 온기로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산책과 한잔의 차가 나에게 준 것은 결코 짧지 않았다. 빠듯한 일정 가운데 이런 여백을 마련해 준 지인에게 고마운 마음이 절로 든다. 바쁨 속에서도 한가로움은 이렇게, 누군가의 작은 배려와 스스로 걸음을 멈추려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것이었다. 
 
연꽃도, 무궁화도, 배롱나무도, 매미 울음도, 그리고 쌍화차 한잔도 그날의 모든 순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문득문득 나를 쉬게 해줄 것 같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한여름 더위가 오겠지만 나에겐 따뜻하고 감사한 여름의 기억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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