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교수의 노동법 이야기 1] 시민법과 사회법의 차이와 노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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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교수의 노동법 이야기 1] 시민법과 사회법의 차이와 노동법
  • 하종강 교수(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 승인 2022.09.27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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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교수
사람들은 보통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라는 말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은 어디까지나 ‘시민법’ 체계 내에서 진리일 뿐이다. 근대 이전 시대 시민계급이 시민혁명을 통해 봉건제를 무너뜨리던 무렵 “사람은 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신념이 부당한 신분상 예속을 해체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 신념이 체계화된 것이 바로 ‘시민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인간은 지위고하와 빈부격차 등으로 인해 불평등한 것이 현실이다. 기업을 소유한 경영자와 그 기업에 고용되는 직장인은 도저히 평등할 수가 없다. 치과병원 원장과 그 병원에 고용된 치과위생사가 어떻게 평등할 수가 있겠는가? 형식적으로 법 앞에 평등한 인간이 실제로는 전혀 평등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법체계가 요구되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이른바 ‘사회법’이다. 사회법 아래에서 모든 인간은 불평등하다. 따라서 불평등하게 적용함으로써 평등을 구현하는 것이 사회법의 원리이다.
 
예를 들어, 시소 놀이를 하는 어린이들을 상상해 보자. 시소 한쪽에는 무거운 아이들이 앉아 있고 반대쪽에는 가벼운 아이들이 앉아 있을 때, 다음에 올라타는 사람은 어느 쪽에 앉아야 할까? ‘평등’하게 가운데?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반드시 가벼운 쪽에 올라타야 실제로 시소가 평등하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남사당패에서 줄 타는 광대는 줄 위에 올라갈 때 부채 하나만 들고 올라간다. 광대의 부채는 언제나 광대의 몸이 기울어지는 반대편으로만 펼쳐져야 한다. ‘평등’하게 가운데로 펼치면 광대는 곧바로 줄에서 떨어져 버리고 만다. ‘형식적 평등’이나 ‘기계적 중립’이 몰가치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중립(中立)’이란 글자 그대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에 선다는 뜻이다.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기둥은 반대편으로 힘을 가해야 가운데 똑바로 설 수 있다. 사회법이란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을 때 그 반대편으로 펼쳐지는 부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돈을 갚지 못하면 살을 1파운드 베어 가지겠다”는 계약은 시민법의 계약 자유 원칙 아래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유효한 계약이지만, 사회법 관점으로는 ‘공서(사회정의)’에 반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무효가 된다.
 
마찬가지로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고도 일하겠다”라는 계약 역시 시민법 관점으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유효한 계약이지만, 사회법 관점으로는 자동적으로 무효가 된다. 전혀 지킬 필요가 없는 계약이 되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시민법 관점으로 판단하느냐, 아니면 사회법 관점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반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시민법 원리에 대해 익숙하게 훈련받는다. 유치원에서부터 배우는 교통신호 지키기 등이 대표적인 시민법 훈련이다. “초록불은 가시오! 빨간불은 서시오!”는 지위고하, 빈부격차, 남녀노소 등에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평등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반면에 사회법에 대해서는 배울 기회가 거의 없다. 판·검사와 변호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노동법은 대표적인 사회법인데 우리나라 법조인들 중에는 노동법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 사법연수원이 서초동에 자리하고 있었던 20여 년 전에 사법연수원 노동법 세미나에서 몇 차례 노동법 강의를 했다. 첫날 근로기준법 강의를 마치고 뒤풀이에서 사법연수생 대표가 하는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저희들이 뭔가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지 마세요. 오늘 강의를 들은 연수원생들 중에서 90% 이상이 근로기준법을 여기 와서 처음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곧 판·검사나 변호사가 될 사람들이다. 한 기수에 천명이나 되는 사법연수원생들 중에서 노동법 세미나에 참여한 사람은 불과 수십 명이었다. 노동법을 제대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기특한’ 연수생들 중에서 90% 이상이 노동법을 그날 처음 봤으니, 나머지 9백여 명은 노동법을 거의 공부하지 않은 채 법조인으로 사회에 진출한다는 뜻이다.
 
당시 사법시험 2차 시험에 노동법이 출제되지 않으니 노동법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법과대학이 많지 않았다. 1차 사법시험에서 노동법을 선택할 수는 있으나 공부해야 할 분량이 기업법과 비교해 열 배도 넘으니 선택하는 응시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노동자이거나 노동자 가족인 사회에서 노동법에 무지한 법조인을 양성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법고시가 폐지된 뒤 새로 마련된 법학전문대학원 체계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21년 변호사시험 응시자 3,156명 중 노동법을 선택한 사람은 203명에 불과했다. 이 말은 대한민국 판·검사와 변호사들 중에서 90% 이상은 여전히 노동법을 거의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앞에 설명한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계약과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고 일하겠다”라는 계약이 무효라는 내용은 노동법 강의 초반부에서 시민법과 사회법의 차이를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법조인이나 정치인들이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고도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너무 쉽게 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 사회의 노동법 교육과 법조인 양성 과정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주장하지 말라고 만든 것이 바로 최저임금제도의 취지이거늘 과연 노동법을 공부한 적이 있는지 의심이 들기까지 한다.
 
우리 사회의 많은 법조인들은 사회법 사건인 노동문제를 계속 시민법 관점으로 판단하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고 있다.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약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조차 약한 사람들을 ‘편드는’ 행위로서 엄정중립에 어긋나는 일이고 ‘과잉보호금지원칙’에 위배된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자들이 헌법상의 단체행동권인 파업을 함으로써 회사에 재산상 손해를 끼치면 그 손해를 회사에 배상해야 한다는 이상한 판결이 우리나라 법원에서 나오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2003년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서울의 한 ‘명문대’ 교수는 언론사 취재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에서 두산중공업은 채권자이고 배달호 씨는 채무자입니다. 회사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한 채무자가 그 부담 때문에 자살한 것과 같은 사건에 대해서 회사가 왜 책임을 져야 합니까? 회사에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나는 이 사건을 그렇게 봅니다.”
 
사회법 사건을 시민법 원리로 판단하면서 그 잘못을 모르고 있는 무식한 학자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같다. 다른 나라에 알려질까 창피스러운 일이다. 노동법에 대해 공부하기에 앞서 우리나라 노동법의 실태부터 설명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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