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교수의 노동법 이야기] 한국 근·현대사와 노동인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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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교수의 노동법 이야기] 한국 근·현대사와 노동인권의 관계
  • 하종강 교수(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 승인 2022.12.27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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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교수
MBC 정은임 아나운서에 대한 추억
오래전, MBC FM 방송에 <정은임의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영화와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많이 알려진 프로그램이었는데, 방송사에서 그 프로그램을 폐지했더니 애청자들이 ‘정영음’이라는 이름의 동호회를 만들어서 8년 넘게 활동했다. 결국 MBC가 그 프로그램을 폐지한 지 8년 6개월 만에 부활시켰다.
 
그 무렵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의 대표 김주익 분회장이 고공 크레인 위에서 회사에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다가 129일 만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김주익 분회장이 남긴 유서에는 “아이들에게 휠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 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돼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도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며칠 뒤 정은임 아나운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방송을 시작했다.
 
“19만 3천 원, 한 정치인에게는 한 끼 식사조차 해결할 수 없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입니다. 하지만 막걸리 한 사발에 김치 한 보시기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한 사람에게는 며칠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는 큰돈입니다. 그리고 한 아버지에게는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에서조차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한 짐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휠리스를 사 주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일하는 아버지 고 김주익 씨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이 19만 3천 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19만3천 원, 인라인스케이트 세 켤레 값입니다. 35m 상공에서 100여 일도 혼자 꿋꿋하게 버텼지만, 세 아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아픈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겨진 아이들에게 인라인스케이트를 사 준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도, 정치인도 아니고요. 그저 평범한, 일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유서 속에 그 휠리스 대목에 목이 멘 이분은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휠리스보다 덜 위험한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서 아버지를 잃고 이 위험한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건넸습니다. 2003년 늦가을, 대한민국의 ‘노동귀족’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방송을 듣던 사람들은 공중파 방송에서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깜짝 놀랐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그 얼마 뒤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하늘에서 아마 김주익 열사를 만났을 거야.”라는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어떻게 그런 내용의 방송을 하는 아나운서가 될 수 있었을까? 노동조합 간부 활동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MBC 노동조합 ‘여성부장’이었다. 학생들과 함께 MBC 견학을 가면, 안내하는 직원들이 ‘MBC 직장탁아소’가 보일 때마다 “저 탁아소도 정은임 선배가 죽기 며칠 전까지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만든 거예요”라고 설명하곤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후배들은 그렇게 정은임 아나운서를 훌륭한 선배로 기억하고 있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노동조합 간부로 활동하면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더욱 커진 것인데, 이렇게 실천적 경험이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일기예보 배경 화면으로 같은 거리 풍경을 찍으면서도 노동조합 간부 활동 경험이 있는 카메라맨은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의 모습을 화면 귀퉁이에 조그맣게라도 담아 보려고 노력한다든가 하는 차이를 보인다. 경험이란 사람에게 그렇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경험’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한 나라가 경험한 ‘역사’ 역시 그 사회에 가치관이 형성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회 구성원들이 동시에 일정한 경험을 공유하면 그러한 경험이 그 사회에 형성되는 가치관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을 “역사 발전 과정이 사회 정체성을 규정한다”라고 표현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거쳐 온 역사는 한국 사회의 노동인권에 대한 이해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일제 식민지라는 근대화 과정
우리나라 노동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왜곡된 근현대사를 강조하면 “노동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굳이 일제 식민지 시절까지 들추어낼 것은 뭐냐?”고 탓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특별한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식민지라는 왜곡된 역사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부터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우리나라는 중세 농경사회에서 근대 산업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이 다른 나라와 매우 달랐다. 조선 사회의 여러 가지 잘못된 점들을 백성들이 스스로 깨닫고 법과 제도를 잘 고쳐가면서 민주공화제 대한민국으로 바꾼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스스로의 계획과 전혀 무관하게 일제 식민지라는 비정상적 방식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이 돼버렸다. 근대사회에 필요한 사회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 나라의 국모를 ‘낭인’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깡패들로 구성된 일본 침략 세력이 처참하게 죽여 버린 천인공노할 만행의 역사적 의미는 그것이다. 백성들 손으로 직접 사회를 바꾸는 귀중한 경험을 박탈당한 것이다.
 
식민지 사회의 공통점은 도덕성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동족을 배신해야 출세하는 사회, 동족을 많이 배신할수록 크게 출세하는 사회가 된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사회 모든 분야의 지도자가 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의 공통적 현상이다.
 
식민지 시대의 온갖 모순들은 해방과 동시에 극복되기 마련이다. 해방이 되면 동족을 배신하고 출세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당하고 그 대신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거나 해외에 피신해 있던 정의로운 사람들이 사회에 복귀해 모든 분야의 지도자들이 교체되면서 나라가 바로 잡히게 되는 것이다. 정치·경제·언론·교육·문화·행정, 심지어 종교 분야까지 모든 분야의 지도자들이 교체되면서 사회의 도덕성이 비로소 확립되게 된다.
 
과거 청산을 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들 중에서 해방이 된 뒤 사회를 바로 잡는 과거 청산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거의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나치 협력자들을 색출해 6천 명 이상에게 사형 판결을 하고 2만 명 이상을 감옥에 보냈다. 그런데도 당시 북유럽 다른 나라들은 프랑스에 대해 “나치 부역자 처벌을 너무 온건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과거 청산 작업을 식민지를 겪은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해 냈다. 심지어 일본도 전쟁이 끝난 뒤 과거 청산 작업을 하면서 7명의 군국주의자들을 처형했다. 그때 처형당한 전범들이 있는 곳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이다.
 
대한민국만 그러한 과거 청산 작업을 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경찰 앞잡이 노릇을 했던 조선인 숫자가 대략 7천 5백 명 정도이다. 다른 나라들 같았으면 해방된 뒤 대부분 감옥에 가거나 처형당했을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사람들 중에서 5천 명 정도가 대한민국 경찰이 됐다. 초창기 경찰 간부들 중의 80% 정도가 친일 경력자들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경찰뿐 아니라 국군이나 법조계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발생했다. 일본군 장교를 했던 사람들은 국군 장교가 됐고, 독립군을 잡아다가 수사했던 검사들과 중형을 선고했던 판사들이 고스란히 이승만 정부의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거나 법대 교수가 됐다. 동족을 배신했던 식민지 부역자 곧 ‘반민족 행위자’들이 해방 뒤에도 집권에 성공해 경제 개발과 근대화의 주역을 계속 담당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그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 해방이 되면서 바로 ‘분단’과 ‘전쟁’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해방이 된 뒤 나라를 바로잡아 보려고 했던 중요한 시기에 국토가 분단되면서 전쟁이 터져버린 것이다. 전쟁 수행을 이유로 친일파 청산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식민지 협력 세력이 해방 뒤에도 권력의 핵심을 계속 장악했고 그 뒤를 이은 세력들이 지금도 사회 모든 분야에 기득권 세력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역사 발전 과정에서 올바른 가치관과 사회의식이 형성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이다.
 
역사 전환의 중요한 시기에 제도와 정책을 결정하고 교육과 언론을 담당한 세력이 국민들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근대적 합리성이 사회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기업에 접대문화가 비정상적으로 토착화된 이유 중 하나는 최초의 근대적 기업 경영을 시작한 사람들이 점령자들에게 아첨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 조선 사대부 출신들이었다는 역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노동인권 문제를 역사학자의 눈으로 보자
어느 사회에서든지 지배 세력은 제도권 교육과 언론 등을 통해 국민의 의식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율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곡된 근·현대사를 겪는 과정 속에서 그 현상이 다른 나라들보다 몇 배나 증폭된 것이다. 그 비틀린 역사가 어느덧 한 세기를 지났다. 일제 식민지 40년, 분단 70년, 그 와중에 군사정부 30년 세월을 겪으며 건설된 자본주의가 어떻게 상식이 통용되는 정상적인 사회일 수 있겠는가?
 
우리 학교에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국민 대부분이 노동자인 사회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 등에 대해 올바른 인식이 형성된다는 것은 부당한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한 기득권 세력에게는 엄청난 불이익이 초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의 노동인권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비틀린 역사 발전 과정을 통찰할 수 있는 역사학자의 눈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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