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교수의 노동법 이야기] 학교에서 가르치는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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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교수의 노동법 이야기] 학교에서 가르치는 ‘노동’
  • 하종강 교수(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 승인 2023.01.2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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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교수
하종강 교수
우리 역사 속의 ‘노동’
신라 역사를 생각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김춘추·김유신·선덕여왕 같은 위인의 이름을 먼저 떠올린다. 외국에서 한국 역사를 공부한 학자들은 조금 다르다. 러시아에서 한국 역사를 연구한 뒤 한국에 귀화한 박노자(Vladimir Tikhonov, 현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 한국학과 교수) 같은 학자는 신라 역사를 생각하면 ‘대박사 박종일’이 우선 머리에 떠오른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자랑인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만든 8세기 후반 신라의 뛰어난 주종 기술자 대박사 박종일에 대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외국에서 한국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
 
“신라는 당시 첨단산업인 청동주조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기술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국가가 인정한 뛰어난 장인을 ‘박사’라 칭했고 최고의 경지에 이른 기술자에게는 ‘대박사’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기술자를 존중하는 제도가 우수한 기술을 가능하게 했다.”
 
다른 나라의 학교에서는 역사를 이렇게 가르친다. 지배 세력 중심의 정치사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서민의 생활사와 노동의 역사 등에 관한 미시사를 매우 중요한 비중으로 가르친다. 역사 속에서 평범하게 살았던 ‘다수’의 삶이 사회를 지배했던 ‘소수’의 삶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백제 역사를 생각하면 우리는 보통 계백장군이나 의자왕 등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백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석마제미·양귀문 같은 건축 기술자들이다. 6세기 후반 일본에 건너가 고대 건축 기술의 기반을 마련해 ‘일본 고대 건축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사람들이다. 백제는 매우 우수한 건축 기술을 보유한 나라였다.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기업은 일본의 1500년 된 전통가옥 보수 기업인데 그 회사 설립자가 백제 사람이었다.
 
한국 경제성장의 바탕을 이룬 것은 1960년대의 직물 기술이었다. 박정희 정부가 자랑하는 ‘한강의 기적’ 역시 직물 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00여 년 전 최초로 일본에서 근대적 염직 기술을 배워 온 기술자들은 안형중·박정선 같은 사람들이었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대원군·김옥균 못지않게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한국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는 학교 교육에서 ‘노동의 역사’를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교육의 필요성 제기
2011년 말, 광주의 한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고3 실습생이 주 58시간, 한 달 100시간의 연장근로를 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6년이 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6년 5월에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하던 19세의 하청업체 비정규직 ‘김 군’이 전동열차에 치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2017년 1월에는 전주 지역 통신회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생으로 근무하던 여고생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으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제주의 한 생수 제조업체에서 현장 실습을 하던 이민호 군이 압착기기에 눌리는 사고를 당한 뒤 열흘 만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청소년들이 일하다가 다치거나 사망하는 이러한 사건들이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는 원인에 대한 분석들이 다양하게 있었는데, 그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는 학교에서 노동교육을 시행하지 않아서 학생에서 노동자로 신분이 바뀐 뒤에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노동자의 권리,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최저임금제도 등에 대한 예비지식이 전혀 없어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그것이 부당한 것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설령 인식한다고 해도 어디에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2011년 4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학생들에 대한 노동인권 교육의 필요성에 100% 공감한다. 특히 특성화고교에서는 필수적인 만큼 올해부터 민주시민교육의 중요한 일부로 적극 제시하겠다.”고 의지를 밝힌 것에 대해 여론이 뜨거웠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교육과정에서 노동인권과 결부된 권리 측면만 강조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고, 경영계 역시 “노동인권 교육이 근로자의 권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편향될 가능성이 높아 학생들에게 반(反)기업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무상급식과 교사 체벌금지에 이어 교육현장의 공감대 없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이념적 교육정책’이라며 비난했고, 한나라당 대변인은 “현실을 외면한 시대착오적인 이념교육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오만한 교육 독재가 공교육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주장하며 교육감의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문제를 교과서에서 적어도 ‘장’ 또는 최소한 ‘절’ 정도의 분량으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은 다른 나라들의 보편적 현상을 뒤늦게 따라가는 것일 뿐, 결코 과도한 요구가 아니다. 실제로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는 학교 교육과정에서 노동교육을 철저하게 시행하고 있다.
 
독일의 학교 노동교육
독일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모의 단체교섭이 일상화된 특별활동으로 자리 잡혀 있어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1년 동안 대략 여섯 차례에 걸쳐 모의 노사교섭에 참여한다. 기업 경영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주어지면 학생들 스스로 경영자 대표와 노동조합 대표들을 뽑아 임금협상을 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해보기도 한다.
 
한국의 학교에서 이러한 교육을 하게 되면 학생들이 대부분 경영자 역할을 맡아보고 싶어 하겠지만 독일에서는 노동조합 간부 역할을 신청하는 학생들이 훨씬 많아서 경영자 대표 역할을 맡을 학생들이 항상 부족한 편이다. 독일 연수에 참여해 직접 목격한 교사들의 말에 따르면, 어떤 학급에서는 나중에 가업을 이어받아 경영자가 될 학생 한 명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노조 간부 역할을 신청했다고 한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내용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사실들을 토론 주제로 다룬다. 독일 금속노조와 사용자 단체가 체결한 임금협약, 금융노조와 사용자 단체가 체결한 기본협약 등과 함께 노동조합이 발표한 성명서, 노동문제에 대한 신문기사 등이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적정한 임금 인상률에 대한 고민과 단체협약으로 확보한 노동조건이 노동자의 삶과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판단 능력이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양된다.
 
교과서의 목차에는 단체교섭 과정에서 서명운동을 벌이고, 항의문건·펼침막·벽보 등을 제작하고, 노조 간부가 언론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교섭을 마친 뒤 연설문을 작성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나와 있다. 우리나라 학부모나 교사들의 눈에는 마치 학교에서 데모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노동자이거나 노동자 가족인 사회에서 이러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독일 중등 사회과 교과서에서는 전체 340쪽 분량 가운데 93쪽을 노동문제에 할애하고 있다. 그 교과서에서는 노사관계에 대해 “가족 관계와 더불어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관계이며 민주주의와 공동결정의 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가정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직장인들이 많은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직장에서의 노사관계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학생들 대부분이 장차 피고용자 직장인이 되는 사회에서는 학교의 정규 수업 과정에서부터 노동문제를 중요한 비중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의 학교 노동교육
프랑스 초·중등학교 필수 과목 ‘시민교육’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노동교육이다. 초등학교 중급 과정 교과서에는 ‘일, 노동, 권리’라는 대단원이 있고 ‘취업할 권리, 취업한 뒤의 권리’ 등의 소단원이 있다. 노동자들이 취업할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은 일자리를 만들 책임이 있다는 것과 노동자로 취업한 뒤에 가질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친다.
 
10여년 전, 한국의 중고교 사회과 교과서 62종을 전수조사하는 연구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1만7천1백여 쪽이나 되는 한국의 사회과 교과서에서는 ‘노동’이나 ‘근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단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른 나라들의 교과서에는 소단원은 물론이고 대단원 중에도 ‘노동’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단원들이 많다.
 
프랑스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의 <노동·법률·사회> 과목 교과서에서는 ‘단체교섭의 전략과 전술’에 관한 내용이 전체의 3분의 1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시각으로는 “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단체교섭의 전략과 전술을 몇 개월 동안이나 가르치는 거야?”라는 의문을 품게 되겠지만,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노동자이거나 노동자 가족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노동자나 경영자가 그러한 지식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프랑스 중학교 ‘시민교육’ 교과서에는 “직장폐쇄에 맞선 노동조합, 이 사례를 기반으로 노동조합이 어떻게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지 설명해 보시오.”라는 시험문제가 예시돼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공인노무사나 인권 변호사가 돼야 겨우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유럽에서는 중학생들의 필수교양 지식에 해당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예만 들었을 뿐이지, 다른 나라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이다. 전형적인 시장경제 국가인 미국과 일본의 학교 교육에서도 노동교육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해 피고용자 직장인 곧 노동자나 경영자·정치인·언론인 등이 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 노동문제를 이해하는 수준은 마치 ‘산 것’과 ‘죽은 것’만큼 큰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 그 차이가 평생 동안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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