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봉사단 "네팔서 사랑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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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봉사단 "네팔서 사랑노래"
  • 임 성 미(최창수치과의원 치과위생사)
  • 승인 2009.10.20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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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4일간 350여명 진료 … `서로 돕는 여정을'

2009년 여름날. 치과의사 4명, 치과기공사 1명, 자원봉사자 11명과 나(치과위생사)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인천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지난 6년간 장학회와 국내, 해외 의료봉사활동을 해 오던 해성봉사단이 정식 NGO인 with together로 범위를 넓힌 후 첫 봉사활동으로 네팔에 있는 `소망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다.

KOICA(한국 국제 협력단)에서 알게 된 국제 옥수수재단과 연계된 소망의 집은 한국 선교사님들께서 만드신 학교도 있고 고아원도 있는 곳이다.

드디어 네팔 도착! 마음 같아서는 바로 소망의 집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높은 습도와 온도로 진료하기 전 지칠지도 모른다는 선교사님의 말씀에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다음날 오후 4시가 넘어 도착한 소망의 집에서는 해맑은 미소로 반겨주던 200명의 아이들과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환자 수십 명이 있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Denture 환자를 선발해 Impression을 뜨기 시작했다. 치과에 대해서 문외한 자원봉사자들이지만 짧은 시간에 습득하며 열심히 하는 덕분에 15명의 Denture Impression을 뜨고 첫째 날 진료가 끝났다.

이튿날, 기구들을 다시 정리하고, 팀을 이뤄(치과의사 1명에 자원 봉사자 2명) 진료를 시작하였고, 가끔 전력이 부족해 전기가 끊어지긴 했지만 94명의 환자를 볼 수 있을 만큼 체계가 잡혀가고 있었다.

셋째 날에는 주로 Scaling을 했다. 거의 발치를 해야 하는 케이스였는데, 통역사의 말에 의하면 병원비가 워낙 비싸 병원에 가려면 집을 팔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아파도 그냥 아픈 대로 산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진료를 하는 며칠 동안 아프다고 우는 사람, 소리 지르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들의 인내심에 조금은 편한 진료를 하였지만 그리 반기며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그들에게 조금 보탬이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다가온 마지막 진료날, 우리는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은 마음에 일찍부터 서둘렀다. Denture case가 많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봐주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워 결국 10명의 환자 인상을 더 뜨고, 한국에서 만들어 보내 주기로 했다.

3박4일 동안 25명의 Denture 환자와 110명의 일반 환자(Amalgam & Resin Filling 등) 45명의 Scaling 그리고 163명의 발치환자의 진료를 마쳤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료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년을 기약하기로 하고 우리는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다.

해외봉사를 다녀온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지금도 완성된 Denture를 받으며 유독 깍듯이 인사하시던 할아버지, 칫솔 치약을 받으며 해맑게 웃어주던 아이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다음에 진행되는 봉사활동은 좀 더 큰 관심과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끝으로 칫솔, 치약 협찬으로 봉사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어 주신 부산 경남 치과위생사회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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