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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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단상
  • 유성원 목사
  • 승인 2008.02.2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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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 달 샘

 

1. 책상에 놓인 달력을 하나 둘 넘긴다. 어느새 두 달이 흘렀다. 숱한 삶의 얘기들도 벌써 과거의 일. 다음 달 달력도 숫자로 빼곡하다. 숫자를 먹어버리는 유일한 벌레는 인간이다. 갉아먹지도 않고 집어삼킨다. 무엇이 걸러졌고 무엇이 버려졌는가? 무엇이 스쳐갔고 무엇이 남겨졌는가? 전부가 아니자 전부인, 연결되어 있으면서 나눠진, 겹침과 부침의 기록들, 시간들.

 

2. 가끔은 시간에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고감은 오지 아니함만 못하다'는 말처럼 시간에 멋지게 적용되는 말이 또 없지 싶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과거도 미래도 어거스틴에서 비롯된 시적인 말 `영원한 현재'를 순간마다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고백할 필요가 있다.

 

3. 어쩌면 망각의 시간이다. 잊고도 그저 살아간다. 주어진 시간이면 족하다. `주어진'이라는 경계적 언어도 시간의 틈바구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망각의 언어다. 더러 시간의 존재라고 하지만 존재의 시간이 필경 어울린다. 보물상자처럼 여기는 책장 윗 켠엔 애기 주먹 크기의 지구본과 최순우 옛집 엽서와 인근 바닷가에서 주워 올려놓은 돌멩이 그리고 용섭이가 선물한 first circle과 󰡒그대가 홀로 있을 때 황홀하게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라는 글이 쓰인 엽서, 세라믹 십자가와 최종태의 예수상이. 곳곳에 살아온 흔적이 이처럼 가득하고 의미도 풍부하지만 기억할 사람과 기억되는 사람과 기억하는 사람과 기억 속의 모든 풍경들이 잊혀진다. 두서없는 서술은 감성의 끄적임이 아니다. 종내에 튕겨 흩어질 인생 모두가 그처럼 허화로 살다 헌화로 끝나는 순간이 아닌가 불쑥 든 사념.

 

4. 덧쌓인 시간은 꽤 무거운 듯하나 결국은 흩날리는 먼지처럼 사라져 버린다. 두려움이 발생하는 때는 이처럼 시간이 초점을 잃는 순간이다. 한 사람에게서 그렇고, 기억된 순간이 그렇다. 부모나 가까운 사람이 걸어간 시간의 자취를 눈여겨보거나 자신이 걸어온 흔적을 더듬을 때 문득 비슷한 종류의 소회에 젖게 된다. 시간의 무게감을 느끼고 살피고 더듬은 것이지만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시간의 소멸이기 때문이다. 부재의 흔적이란 말처럼 모순형용으로만 표현되는 거기 그 자리는, 없다. 그러한 없음의 예감이 드는 저녁이라는 시간처럼 막막하고 아득한 느낌이란.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creatio ex nihilo라 표현한 신앙의 이유를 정반대의 자리에서 조금은 알겠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거스틴의 정신 한 자락을 놓고 보자면 하나님이 주시는 적극적인 마음일 수도 있겠다 싶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가져가실 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있음을 감사하고 없음 또한 감사할 신앙을 보다 적극적인 역설로서 알고자 하는 것일까. 허나 오늘 이 저녁은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시간의 무게감이 낯설고도 두렵다.

 

5. 아파야지만 보이고 깨닫는 것이 있다. 생니를 앓듯 아팠다. 종일 누웠다. 십자가를 닮은 아픔과 누임에서 십자가 없는 인생은 얼마나 슬픈가를 생각한다. 거저 오고 거저 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그리고 사람이 무엇이관대…

 

2005년 1월 옹달샘에서 제 벗, 용섭이의 부모님이 당한 사고를 안타까워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는 분께서 왜 착한 사람을…" 용섭이는 서른 해 저의 친구였습니다. 지난 1월 6일 오전 11시 20분을 넘긴 시간, 아들 준혁이의 100일 잔치를 몇 시간 앞두고 교통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용섭이와 그 가족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용섭이의 더 나은 반쪽인 효진씨와 그의 아들 준혁이를 위한 글로 새겨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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