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같은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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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같은 일상
  • 유성원 전도사(정읍/중광교회)
  • 승인 2004.12.2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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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보통은 이른 아침에 일어납니다. 불을 켜고 성경을 펴듭니다. 짧은 묵상을 마치고 늘 하는 체조로 몸을 풉니다. 겨울이라서 저 보다는 조금 늦게 해가 기지개를 폅니다. 추위를 감싸주는 따스한 햇살이 오늘따라 수줍은 친구처럼 여겨집니다.

얼마 전엔 작은 형이 사용하던 생활용품들을 이곳에 가져왔습니다. 그 중 네모난 자개상 비슷한 탁자를 거실 중앙에 놓고 허브의 한 종류인 로즈마리를 위에 두었습니다. 보기에도 좋고 향도 좋습니다. 집 안 가득한 햇살과 더불어 슈바이쩌가 연주하는 바흐를 벗 삼아 상쾌한 하루를 비로소 엽니다. 그리고 아침상을 차릴 즈음하여 문 밖에 우선 나갑니다. 학교로 일터로 향하는 아이들과 마을 어른들과 인사하기 위해섭니다.

아침을 들고 이런저런 청소를 마치고 간단히 차를 마시면서 여전히 미숙하기만한 거룩한 독서(rectio divina) 시간을 갖습니다. "당신은 마음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니 지혜의 심오함을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시편 51:6). 가끔은 소성면에 자리한 우체국에 들르기도 합니다. 우체국 옆에는 소성초등학교 아이들의 참새방앗간인 보배상회가 있습니다. 백 원짜리 과자며 햄이며 막대아이스크림의 진풍경에 빠져(!) 있노라면 어느새 몰려든 아이들에게 에누리 없이 잔돈 털리게 마련입니다. 교회 옆 한 귀퉁이에는 작은 텃밭이 있습니다.

지금은 잡초만 무성한 그곳에 지난여름 심기운 호박이 머리통만한 놈으로 서너 개 열렸습니다. 문 앞에 크기별로 가지런히 놓아두니 녀석들도 참 보기가 좋습니다. 호박죽 끓이는 법도 배워야겠습니다. 무슨 궁상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살림이 손에 익지도 않은 사람이 무엇 할 수 있을까, 하고 멋 적은 결론도 내립니다. 종종 거르는 점심은 아침상을 반복하거나 간단하게 마칩니다. 여름날 오후엔 잡초를 뽑았으나 빗장 풀린 계절을 나려면 이곳저곳 살펴야만 합니다.

구멍난 보일러실 지붕의 함석판을 다시 잇대어 막고 기름도 채워 넣었습니다. 노출된 지하수 펌프는 동파 방지를 위해 벽돌로 둘러치려고 합니다. 조용한 시골이지만 은근한 일거리들로 풍성한 시간입니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김장 품앗이로 한창 바쁩니다. 지난 주간에는 두 박스를 넘길 만큼 많은 김치를 받았습니다. 고춧가루 엉긴 김치가 '매운 사랑'으로 담기운 것만 같습니다. 너무 매워서 눈시울 붉어지기도 합니다. 한 일도 없고 준 것도 없이 지내온 나날들을 돌아보는 저녁이면 구약성서 시편을 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것도 같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시편 8<&28145>4) 이 달 말에는 크리스마스가 돌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 오셨으면 됐지 왜 매년 오셔서 저 고생하시는 걸까, 깐죽이다가도 사람들 잔치에서 늘 소외되는 예수님이 안쓰럽기도 하고 불황의 늪이라면서도 휘황찬란한 트리와 소음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이 불쌍하기도 합니다.

밤은 지나고 아침이 옵니다. 어느덧 다음 해를 기약할 때가 되었습니다. 살아온 날이 작은 이야깃거리와 아름다운 추억들을 선물한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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