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몇 가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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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몇 가지 기억
  • 유성원 전도사(정읍/중광교회)
  • 승인 2004.11.2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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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희노애락은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요소입니다. 좋기도 했고 싫기도 했으며, 원하기도 했고 원치 않기도 했던 여러 순간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습니다. 기억의 저편에서 호출되어진 그날의 순간들을 때때로 적어둡니다. 그러다보면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즐거웠던 일이든 아팠던 일이든 그 모든 일들이 행복의 문으로 이어주는 길이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1 고등학교 2학년, 주민등록증이 나온 그 날, 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불러 앉히곤 말씀하셨다:"성원아, 주민등록증 좀 보자. 그래 주민등록증이 나왔는데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 건지 생각해 봤냐? 너도 이제 어른이라는 얘기다. 아직은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이지만 어른으로서 성인으로 살아가야 할 대학시절부터는 네 인생을 네가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거다. 알았지?"

국민학교 5학년에 들어서서 전 과목의 새 책을 받아 안고 온 날이다. 서둘러 가방을 내려놓고 밖에 나가 놀려고 하는 나를 어머니는 서두름 없이 부르셨다. "성원아, 오늘 받은 책 전부 가지고 여기 좀 앉아라. 단정하게 무릎으로 앉아서 모두 읽거라." 나는 거의 아홉 권에 달하는 새 책을 옆에 쌓아두고 국민교육헌장부터 시작해 인쇄일이 적힌 페이지만 빼고 다 읽어 내려갔다. 숫자로 빼곡한 산수책까지도. 몇 시간이 흘렀을까. 곁에서 뜨개질하던 어머니는 한 번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2 우리 집 장롱 위에는 싸리회초리가 한 다발쯤 놓여 있었다. 삼형제의 교육용도 회초리였다. 그런데 그 회초리에 맞아본 기억이 없다. 다만 아버지의 굵은 팔뚝이 장롱 위를 향하는 순간만 머릿속 영상으로 남아있다.

아마도 우리가 매를 맞았어야 할 순간에 한 개씩 두 개씩 싸리회초리를 그리 쌓아두신 것이었으리라고 회상하게 된다. 종아리를 훈계하며 부러져야 할 싸리회초리 대신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을 꺾으신 것이다.

고3 시절. 어머니는 영양가 있는 다른 음식을 차려주지 못하는 것을 내내 서운하고 미안해 하시면서도 아침이면 뽀얗도록 하아얀 종지에 계란노른자를 정성껏 담아 그 위에 참기름 한 방울과 소금을 조심스레 얹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 위에 올리셨다.

3 작은 형은 영문도 모르고 야단을 맞았다. 일은 저녁식탁에 함께 앉은 큰 형과 내 앞에 놓였던 가자미 튀김에서 시작되었다. 큰 형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나는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당연히 젓가락질이 형에 비해 느렸고 유교적 사회에서 형이 먼저 반찬을 기웃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나는 오른손잡이였고 형은 양손잡이였다. 문제는 가자미가 한 마리였다는 것. 큰 형은 무서운 기세를 더한 현란한 손놀림과 날렵한 속도로 가자미의 배와 등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결국 가자미의 살갗도 손도 대지 못한 나는 수저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울상과 징징대는 소리에 참다못한 어머니는 둘 다 그만 먹으라며 호통을 치셨다. 바로 그 때 작은 형이 온 것이다. 우리 집이 지금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니들 알고 있기는 한 것이냐면서 어머니는 빗자루를 들었고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리시고야 말았다. 아직도 그 집이 강릉시 금학동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이름은 '싸전'. 말하자면 수제 빵집이다. 아들 셋을 앉히고서 긴 시간 우시던 어머니는 내게 천오백 원을 주시면서 햄버거 세 개를 사오라고 하셨다. 그 날 저녁 우리 삼형제는 눈물 젖은 햄버거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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