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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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인
  • 유성원 전도사(정읍/중광교회)
  • 승인 2004.08.1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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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작은 일들 때문이라는 것. 이건 진짜 맞더라고요. 사는 게 작은 일들, 아주 사소한 일들이 뭉쳐져서 겹겹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그 하나하나를 신경 쓰지 못하면 삶 전체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전 그렇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즘은요." (정은임의 FM영화음악)

어려서부터 라디오가 좋았습니다. 지난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지긋한 나이의 사람들이 가졌을 법한, 추억에 잠긴 얼굴마저 흉내 내보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새벽 2시부터 3시까지 방속되던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을 들었습니다. 첫 방송이 1992년 가을이었고 마지막 방송이 1995년 봄이었으니까, 조금 과장한다면 제가 대학 진학하던 해부터 군입대하기 전까지 거의 대부분의 방송을 들은 셈입니다. 한번도 만난 적 없고 얼굴 생김새도 몰랐던 그녀의 1995년도 마지막 방송입니다.

"꽃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 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 이별이 아니고요. 제가 좋아하는 시인 구광본 시인의 시 중에서 한 구절로 오늘 시작했는데요. 시구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반대네요. 제가 92년 가을에 방송을 시작했으니까 꽃 지는 날 그대와 만났고요. 이제 봄이니깐 꽃 피는 날 헤어지는 셈이 되었네요. 오늘 여러분과 만나는 마지막 날인데요. 덜덜 떨면서 첫 방송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침 햇살이 남다르게 느껴지거나 책을 읽다 멋진 글을 발견할 때면 맨 먼저 떠올렸던 게 바로 이 시간이었습니다. 저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1995년 4월 1일 <FM영화음악> 마지막 방송 클로징 멘트)

가슴따스했던 그녀가 8월 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7월 22일 발생한 갑작스런 교통사고 때문입니다. '갑작스럽다'는 말마따나 삶이란 의외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의외성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찾아오는 것이기도 하지요. 제가 사랑했던 다른 한 여인은 8월 8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와 나눈 대화는 열마디도 채되지 않습니다.

"사모님은 살면서 어떤 순간을 제일 좋아하셨어요? 언제가 제일 행복하신가요?" "시편으로 하루를 여는 새벽예배 마치고 집 뒷산을 오르면서 꽃이며 나무며 풀벌레며 오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이 제일 행복해요. 그 순간이 제일 좋지요. 요즘은요."

2003년 아주 이른 봄날 대신감리교회의 홍화자 사모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조금은 아래로 향한 시선과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려 겸손하게 맞잡은 손 모양새가 첫 눈에 기도 많이 하시는 분임을 알게 했습니다. 그녀는 한 해가 넘도록 말기암으로 고생하면서도 한 번의 내색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할 자리를 아픔에 내어주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빈소에 마련된 그녀의 영정을 대하면서 건네지 못한 숱한 말들이 입 안에 맴돌았습니다. 한 줄기 눈물로나마 그녀의 가는 길을 깨끗하게 닦아드릴 수 있었을까요?

한 발이 땅에 닿으면 한 발은 허공을 가릅니다. 아이러니 가득한 삶에서 사랑을 만나고 사랑을 놓아주는 일에 조금은 친숙해질 무렵 깨닫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겐 '순간'의 소중과 '사랑'의 귀중을 알게 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정은임 아나운서 (1968~2004)와 황화자 사모님 (1956~2004). 이제는 "치통처럼/속으로 간진해야 할 아픔도/기꺼이 받아들이고"(이해인, '사랑병' 중에서) 그이들을 떠나보냅니다. 삶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유를 누리고 헤아리는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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