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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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기약
  • 유성원 (대신교회)
  • 승인 2004.02.2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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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일년에 한 번 꽃핀다고 합니다.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선물하려던 요놈은 끝내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것인지. 모쪼록 건강하길 바랍니다. 시들시들한 영혼에게는 떨어지는 낙엽에 커다란 시련과 상념을 묻히게 마련이니까요.

국민(초등)학교 4학년 시절, 환경미화가 한창이던 봄날의 일입니다. 언제나 미소를 꽃피우시던 담임선생님께서 학급 모든 아이들에게 작은 화분 하나씩 가져와 키우자고 제안하셨지요. 며칠 뒤, 교실 안은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화분들이 즐비해졌고 지나던 선생님들과 다른 반 친구들에게 우리 반 교실은 하나의 화원이 되었습니다.

물론 나도 작은 화분 하나를 들였지요. 화분을 가져오기로 한 마지막 날. 일처리나 사유의 속도가 언제나 그림자처럼 늑장인 내가 당일 아침에서야 화분을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건 퍽 자연스런 일이었어요. 하여, 부리나케 아버지더러 화분 하나 사오라며 떼를 썼구요. 발을 동동 구르던 막내둥이의 모습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자전거에 오르시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몇 분 뒤. 단숨에 다녀오신 아버지의 손에는 작은, 그러나 작은 것보다 더 초라하고 못생긴 화분 하나가 놓여있었습니다. 화원인 우리 반의 여러 화분에 전혀 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창가 한 귀퉁이의 내 화분은 그렇게 보잘 것 없었지요.

몇 달이 흐른 어느 날. 다른 화분들은 이제 다 시들어 한 송이 꽃조차도 찾을 수 없게된 바로 그 다음 날. 이른 아침 교실에 도착한 내 눈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아침햇살 가득 머금은 꽃 한 송이가 내 그 초라한 화분에 꽂혀있던 것입니다. 당장의 내 가슴 속에는 기약되지 않았던 그 무엇이 시간이 흐른 뒤 마치 약속했던 것 마냥 꽃 피워 올랐지요. 내 가슴속에, 아버지의 말없는 사랑과 함께.

 

일년에 한 번 꽃피우는 이 놈은 난(蘭)입니다. 내 말없는 사랑과 함께 누군가의 가슴에 쥐어져 꽃 피워 올렸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런 바램을 대보름달에 담아 과거 담임선생님과 아버지의 미소를 호출해 보았습니다. 드뷔시(claude debussy)의 월광(clair de luna)곡도 따스하게 흐릅니다. 언제나 겨울일지도 모를 인생의 사계절을 지나면서 언가슴 녹일 미소가 당신 가슴에도 꽃 피워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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