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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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 봄
  • 김영남 (경복대학 치위생과 교수 치위협 정보통신위원
  • 승인 2002.04.17 1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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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수업을 마친 후였다. 나른한 표정으로 연구실에 돌아와 의자에 봄을 구겨 넣고 멍하니 책상 벽면을 바라보고 있던 어느 날, 밖에서 들리는 갑작스런 소란에 순간 동그랗게 귀를 말고 기울여보았다.

팝콘이 툭툭 터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옆구리를 간질어 장난치는 조카녀석들의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크게는 비 오는 날 현관 앞에서 원터치 우산을 펼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얼까? 봄을 일으켜 조심스레 창문을 열어보니 범인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 유색의 풍경이었다. 온통 가지마다 꽃망울을 터뜨린 채 웃어대는 목련, 개나리, 진달래, 그리고 사정없이 내리쬐는 노란 햇살, 코끝을 스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 봄이다. 바야흐로 봄날이었다.

세상 풍경이 이렇게 바뀌어지도록 아무런 감흥도 없이 하루하루를 시간에 묻혀 지내고 있었다. 사슴을 쫓는 사냥꾼은 숲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니 꼭 그 격이었다. 함빡 물기를 먹고 내뿜는 푸르른 생명들과는 달리 일상의 생활에 쫓겨 손바닥만한 여유 한점없이 울(鬱)하게, 오페라 극장의 지하실 마냥 굳어진 채로 이 풍경들을 무색으로 지나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도 학생들과의 상담일정이 잡혀 있어 또 어떤 말로 아이들을 현혹(?)해야 할는지 고심하던 중에 난데없는 봄의 침입을 맞이한 것이다. 그 날의 침입자는 칸칸 달력의 깨알같은 글자들에 맞추어 살던 내게 깊은 단싱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기어이 장 루슬로의 시 한편을 읽는 여유까지 허락해 주었다.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도우려 하지 말아라/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련 가운데서/제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더라/

더 빨리 흐르라고/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은 내 의지와 분주한 몸놀림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특히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기(利己)를 포장한 채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슬퍼런 내 오만에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늘 넉넉한 기다림보다는 건조한 입술로 학생들의 뒷꿈치를 물어대며 이 봄날의 아름다운 숲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려고 하는 자에게만 봄은 그 얼굴을 보인다.

이제 긴 호흡 한번하고 사각의 달력 안에 들어 있는 일상들을 정당히 편집한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분홍빛 속내를 말끔히 드러낸 봄의 얼굴과 자글자글 끓어대는 주전자처럼 활기찬 캠퍼스의 젊음을 남은 여백에 가득 채우려 한다면 직무유기라고 할까? 그렇다면 그 죄는 바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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